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드로니코스 3세 (문단 편집) === 니케아 상실 ===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한창이던 1326년, 오스만 베이국이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주요 영토 중 하나인 [[부르사]]를 점령하였다. 거기다 니케아와 니코메디아도 지속적으로 공격당하며 서서히 무너지는 중이었다. 이 중 니케아는 [[니케아 제국]]과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발원지 격이며 제국 제2의 수도였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야 할 도시였다. 이에 안드로니코스 3세는 니케아와 니코메디아를 포위로부터 구원하고 아나톨리아의 국경을 안정화 하는것을 목표로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후일 [[요안니스 6세]])와 함께 최대한도로 징집할수 있는 4천 명의 병력(최소 2천 명)을 이끌고 니코메디아로 향하였다. 한편 제국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오르한 1세]]는 약 8천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펠레카논 언덕을 차지해 니코미디아로 향하는 길을 차단했다. 6월 10일, 양측의 군대가 조우했고 [[오르한]]은 300명의 궁기병대를 보내 언덕을 올라오려는 동로마군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이들은 더 이상 진격하지 않은 동로마 군에게 격퇴되었다. 두 군대는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지만 승자는 결정되지 않았다. 밤이 되자 동로마군은 후퇴를 준비하였지만 오스만 군은 동로마군이 후퇴할 기회를 주지 않고 곧바로 야습을 개시했다. 오스만 군의 습격으로 안드로니코스와 요안니스는 경미한 부상을 당했다는데 진중에는 황제가 죽었다는 헛소문이 퍼졌고, 동로마군은 단체로 패닉 상태에 빠져 붕괴되었고 이는 막대한 손실로 이어졌다. 이에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와 안드로니코스 3세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마르마라 해를 건너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할 수 밖에 없었다. 동로마 제국은 [[펠레카논 전투]] 패전 후 아나톨리아에 군대를 보낼 여력이 없었고, 결국 니케아는 1331년 오스만 베이국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니케아는 [[이즈니크]]로 불리게 되며 21세기가 된 현재까지 오스만-튀르키예 공화국으로 이어지는 튀르크 세력의 영토로 남아있다. 다시 예전의 위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지방 소도시로 전락하였다.] 안드로니코스는 니코미디아를 포함한 다른 아나톨리아 영토도 상실할 수는 없었고 결국 그는 오스만 베이국에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휴전을 맺었지만 니코미디아도 1337년에 결국 함락 당하고 만다. 한편 1329년에 키오스 섬은 마르티노 자카리아의 활약으로 수복되었다. 재정 악화로 해체되었던 해군을 이끌고 이룬 성과였다. [[히오스 섬]]을 해군의 힘으로 수복한 이후 안드로니코스는 재정 악화로 약해진, 사실상 해체된 제국의 해군을 더욱 증강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1332년, 동로마 제국의 해군은 자체적으로는 10척의 배로만 구성되어 있었지만 비상 시 100척의 상선을 징집해 규모를 늘릴 수 있을 정도로는 회복할 수 있었다.[* 상선이라 해서 무시할수도 있는데 이 당시 상선들은 지중해에 들끓는 해적들로부터 상인들과 물자들을 방어하기 위해 상당히 무장이 잘 되어있었다. 즉, 유사시에 군함으로 동원해도 큰 문제가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